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벌 4인
청나라가 붕괴한 후 중국은 막강한 군벌들에 의해 분할되기 시작했다. 사진
왼쪽부터 리위안홍. 첫번째 혁명 당시 억지로 지휘자 역할을 맡았던 그는 우한의
세 지역을 지배했고,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1916년 총통이 되었다. 다음은 만주족 산적 출신인 장쭤린으로, 1920년대에 중국 북부를
호령하는 군벌이 되었다. 옌시산은 결국 강력한 반공산주의자가 되어 1940년대까지 산시성을 지배하면서 근대화에 앞장섰다. 그리고 기독교인
장군으로 알려진 펑위샹. 펑위샹의 조직능력은 공산주의자와 국민당원 양측에서
자기 편으로 데려가려고 구애하도록 만들었다.

서구 열강의 상징
상하이 제방은 1840년대의 조약으로 얻은 미개발 농지에
건설되었다. 은행과 클럽, 상가, 호텔 등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곳으로
모두 영국법의 보호를 받았다. 제방 뒤에는 서양인이 거주하는 가로수 길이 있었다.
흑방의 단원
1966년 9월12일 어린 홍위병이 중국 북쪽 끝에 있는 하얼빈 시장 리판우의 머리카락을 잘라내고
있다. 리의 목에
걸린 간판이 그를 ‘흑방의 단원’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흑방은 마오쩌둥이 새로이 선포한 문화대혁명을 방해하려
한다고 고발당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낡고 봉건적인 모든 요소들을 사회에서 쓸어버리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모인 10대 소녀들은 홍위병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고 공격적인 편이었다. 홍위병 경험에 대한 자전적인
회고록에서 류솔라는 열한 살 때
학교에서 홍위병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애걸했는지 회상하고 있다.
엄청나게 지독한 말로 가족을 공개 비난하고, 한때 지주의
아내였다는 이유로 고발당한 늙은
넝마주이를 감시하는 일을 도운 뒤에야 가입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그 늙은 여인은 류솔라가 감시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목을
베어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당시
이러한 비극은 비일비재했다/북폴리오 제공
연극은 계속된다
왕조가 무너지고 혁명, 내전, 본토와 타이완의
분할이 이어졌을지언정 중국 경극은 모든 지역에서 모든 연령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매혹시켰다. 남자가 여자를 연기하거나 그 반대로 하는 성 역할
뒤집기는 늘 인기였다. 1905년
윈난의 프랑스 영사가 청나라 말 여자 역할을 한 남자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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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숭배자들에게 둘러싸여 번쩍거리는
새로운 전철역을 돌아보는 저우언라이-돋보이도록 실물보다 크게 묘사한-를 그린 그림 아래로 1985년 베이징 중앙역의 칙칙한 풍경 속에서
여행객들이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포스터는 덩샤오핑의 불도저식 개발계획 기간에 도입된 자본주의 요소가
당의 지배적 리더십을 확보하고 ‘마오쩌둥 사상’의 변형된 형태로 인정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상징한다/북폴리오 제공
밝은 불빛
1989년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전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밝혀진 불빛 아래로
여학생들이 모여 들었다. 중국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장소나 책을 읽을 정도로 충분한 불빛이 부족했다. 경쟁이 치열한 시험의 압박에 직면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어둠침침한 기숙사와 도서관에서 빠져나와 불 밝은 광장으로
향했다. 꾀를 내어 반딧불이나 이웃집 초롱에서 반사된 어른거리는 빛으로 공부했다는 역사적이자 문학적인 중국의 전설에 필적할 만한
광경이다/북폴리오 제공
자본주의
1990년대 초 처음으로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고 복권이 도입되면서 상하이에 투기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은 새로 발행한 모든 주식을 앞다투어 샀고 기회를 놓친 사람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났다. 부도덕한 흥행사들은 아주 적은 자본으로도 금방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북폴리오
제공
경쟁하는
중국
스포츠는 경제적, 정치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혹독하면서도 즐거운 출구였으며, 1980년대 말경 중국 운동선수들은 세계무대에서 굉장한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중국은 탁구로
유명해 1971년 중국과 미국의 죽의 장막을 최초로 걷어낸 ‘핑퐁 외교’를 성사시키기도 했다/북폴리오
제공
경쟁하는
중국
스포츠는 경제적, 정치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혹독하면서도 즐거운 출구였으며, 1980년대 말경 중국 운동선수들은 세계무대에서 굉장한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초 최적의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선발한 아이들을 국제체조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 아주 어린나이부터 양성했다/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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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방식
살 집을 찾기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많은 부부가 제한된 공간과 공동주방에서 어떻게든 살아나갔고, 1990년대초 베이징의 전형적인 주거 형태인 ‘후통’이나 통로형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 살았다
생활방식
자녀를
한 명만 낳고 사는 자유로운 현대식 부부가 새로운 이미지로 등장했다. 1995년 상하이의 화려한 쇼핑거리 화이하이루에서 찍은 사진속의 가족은
옷을 잘 차려입고 반짝거리는 새로운 도시세계로 한 걸음 내딛고 있다/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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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이
홍수
1991년 봄에 일어난 안후이
홍수는 중국 역사상 최악의 자연재해 중 하나였다. 화이허와 추 강 유역에 몰아친 엄청난 폭풍우가 원인이었다. 죽은 사람이 수백 명에 달했으며
농산물과 재산 피해는 수십억에 달했다. 제방이 열려 ‘홍수 우회지역’이 생겨났고 주요 탄광과 공장, 하류의 도시 중심지는 구해낼 수 있었다.
300만 명이 홍수로 고립되었고, 130만 명이 피신했으며, 100만 명 이상이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7월에 발표되었다. 피신한 사람들은
대부분 겨우 하루 전에 통고를 받았는데, 가장 소중한 소지품 한 가지만 챙기라는 지시였다. 여름에 구조대의 도움으로 물에 잠기지 않은
고지대로 옮겨진 사진 속의 남자가 고른
소지품은 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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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4월 장제스와
쑹메이링
중국에 새로 부임한 미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이 함께 미소를 짓고 있다. 장제스는 사진을
찍기 위해 의치를 해 넣었다. 중국의 신임 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스틸웰과 장제스의 화합은 중국이 ‘심술궂은 조’ 스틸웰의 지시를 무시하고
참패하면서 깨졌다. 스틸웰은 자신과 장제스가 “샌드위치 한 개만 갖고 구명보트에 올라탔으며 구조선은 멀어지고 있었다”고 말했다/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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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마오쩌둥이 장시
성 루산 휴양지에서 당 지도자들의 가족과 함께 쉬고
있다.
마오쩌둥은 수영을 즐겼는데 이는 건강한 체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였다. 하지만 물
속에서 죽은 동물이나 인분을 만날 때도 있었기 때문에 경호원과 주치의는 걱정이 태산같았다. 통치 기간 동안 마오쩌을 묘사할 때 물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했으며, 태양에서 끌어온 이미지로 대체된 것은 말기에
가서다/북폴리오 제공
1951년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사진
마오쩌둥의 가족사는 비극적이다. 형제들과 첫째 부인은 내전 당시 처형당했고, 첫번째
결혼에서 얻은 아들 한 명은 한국전쟁 때 죽었으며, 둘째 아들은 정신병원 신세를 졌다. 대장정 중에 둘째 부인에게서 얻은 큰 딸 리민과
마오쩌둥이 리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린 소년은 마오쩌둥의 죽은 남동생의 아들
마오위안신이다/북폴리오 제공
마오쩌둥이 샹강에서 수영하고나서
진흙투성로 고향(후난)출신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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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에 지쳐
사진을 찍은 1972년 1월경 마오쩌둥은 자신이 선동한 혼란에 지쳐 극단적인 혁명
비전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수년간 ‘마오쩌둥의 가장 가까운 전우’로 불렸던 군 간부 린뱌오를 숙청했고, 비밀리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다음 달에 중국을 방문하도록 준비했다.
사진에서 마오쩌둥은 혁명 초창기
지지자였던 천이의 장례식에 참석해 미망인 장천의 손을 잡고 있다. 마오쩌둥은 수염이 자라게
내버려두었는데, 매우 의기소침한 상태에서만 이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2월말 닉슨이 방문할 때쯤에는
다시 깨끗하게 면도했다.
위대한
생존자
여든 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하고 활기찬 덩샤오핑이 인민공화국 수립 3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사후에 지도자로
등극함으로서 용수철과도 같은 회복력에 대한 놀라운 찬사를 받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 때 당직에서 쫓겨났고,
1976년 봄 험악한 정세 속에 또다시 추방되었던 덩샤오핑이 세번째 복귀에 성공한 것은
인민해방군과 당 고위급 관료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 또한 덩샤오핑은 흠잡을 데 없는 혁명 경력이 있었다.
1904년에 태어나 1920년대 초
프랑스에 머물 당시 노동-연구모임의 젊은 학생으로서 공산당에 가입했다. 장시 소비에트와 대장정을 통해 투쟁을 전개했고, 중국 북부에
공산 게릴라 기지를 세우는데 일조했다. 이 기지는 내전에서 1949년 최후의 승리를 이끄는 발판이 되었다/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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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장제스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함께 국민당
망명 정부의 정치와
사회를 지배했다. 장제스는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인 전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1975년 장제스가
사망한 뒤 긴장완화를 위한 시험적인 예비 교섭이 이루어졌고, 1980년대초 드디어 타이완 출신 중국인이 처음으로 본토에 들어가 친척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북폴리오 제공
‘재심’
1980년대 초 덩샤오핑이
마오쩌둥 집권기의 두드러진 비리 일부를 바로잡으려 하면서 사용한 구절이다. 1981년 1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문화대혁명 시절 수십만 명을
죽이고 박해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거쳐 사형선고를 받고 있다.
장칭을 포함해 4인방은 마오쩌둥이
죽은 지 한 달 뒤인 1976년 10월에 체포되었다. 사실 장칭은 2년의 형 집행 유예를 승인받았고, 뉘우치는 모습이 보이면 사형선고를
종신형으로 바꾸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칭은 참수당하는 편이 더 영예로울거라고 분명히
말하면서
“천안문 광장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형할 것을 선고하라”고 법정에 맞섰다. 장친은 여전히 반항적이어서 독방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가택연금으로 바뀌었고,
처형되지는 않았다. 1993년 자살했다는 발표가 있었다/북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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