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할머니
★ 종이 할머니 ★
우리집 지하방에
새우등 진 할머니 한 분이
이사를 오셨습니다.
밭에서 호미 들고 일하다 바로 올라온 듯한
허름한 옷차림에 수십 년간 입에 밴 충청도 사투리.
서울에 사는 세련된 할머니들과는 판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막내아들 밥해주러 왔다는 할머니는 다가구주택을
신기한 듯 둘러보셨습니다.
"이런 새장 같은 디서 답답해서 어떡코롬 산디야?"
그때 마침 지나가던 재활용품 수거 아저씨가 이사 후
버려둔 폐품과 종이 더미를 보고 할머니께 흥정을 붙였습니다.
"테래비는 2천원,
종이랑 책은 3천 원
쳐드릴게요."
그런거래가 신기한 듯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으셨습니다.
"고장나서 안 나오는 것인디,
테레비도 사가고 종이꺼정 사가네유."
아저씨는 세상물정 모르는 할머니께 옜날 고물상과
비슷한 거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바빠 지셨습니다.
종이도 돈이 된다는 걸 아신 할머니는
이골목 저골목 다니며 신문지나종이를 모으셨고,
조금씩 욕심이 생기는지 며칠 뒤에는 손수래까지 사서 끌고
주변 상가를 돌며 종이를 실어날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들이 집에 오는 날은
종이더미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아들이 못 하게 말릴까 봐 조심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해질 무렵,
여느 때처럼 손수레를 끌고 나간 할머니가
허리 보호대를 감고 돌아오셨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습니다.
"암것도 아녀유.
언덕바지를 오르다 그냥 삐끗했당게."
그러시며 아들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다음날
시골에서 큰아들 내왜가 올라왔습니다.
할머니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인데,
할머니는 괜찮다며 큰아들 내외를
안심 시켰습니다.
전후 사정 모르는 큰아들은 동생한테 어머니를
집에만 계시게 하라고 책망어린 당부를 하고 서둘러
일어섰습니다.
시큰거리는 허리에 손을 얹고
배웅나온 할머니는 속주머니에서 차곡차곡 접은
천 원짜리 한 뭉치를 꺼내 큰 며느리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이거 막둥이가
애들 과자 사주라고 주던디....."
그돈은
할머니가 종이를 팔아 모은
돈이었습니다.
큰아들 내외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조금 전 큰아들이 주고 간 용돈봉투를
막내에게 건냈습니다.
"막둥아! 이거 느그 형이 주라던디....."
두 아들 모두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아는 할머니는
형제간의 우애를 그렇게 지켜주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오늘도 주택가를 돌며
종이를 줍고
계십니다.
====행복한세상====